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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콜럼버스 1492년은 콜럼버스와 에스파냐에게 행운의 해였다.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가 (남편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국왕과 같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어인들을 몰아내고 그라나다를 정벌했다. 1492년 1월 2일의 일이었다. 에스파냐를 건설할 초석을 놓은 셈이었다. 그 해 4월 17일 이사벨 1세는 콜럼버스와 협약을 체결했다. 이사벨 여왕의 콜럼버스에 대한 후원은 파격적인 조건이었다.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평민이었던 콜럼버스는 자신과 후손들에게 귀족의 칭호인 ‘돈’과 제독의 계급을 요구했다. 더불어 새로 발견된 땅에서 얻은 수입의 10%를 원했고, 모든 무역 거래의 8분의 1을 자신의 지분으로, 그가 발견한 땅이 식민지가 될 경우 자신을 총독으로 임명해달라는 것이었다. 여러 차례의 논의를 거쳤지만 결국 이사벨 여.. 더보기
칭기즈칸 복수와 약탈의 세계에서 사고무친의 고난을 겪다 1162년경 오늘날의 몽골과 시베리아 지역이 맞닿은 곳 근처, 오논 강 유역 숲에서 보르지긴 씨족 예수게이와 올크누트 부족 출신 후엘룬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후엘룬은 메르키트 부족 전사의 아내였으나 예수게이에게 납치당한 처지였다. 예수게이는 이미 첫 부인 소치겔과의 사이에 아들 벡테르를 두고 있었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테무진(鐵木眞). 예수게이가 죽인 타타르족 전사의 이름이었다. 예수게이는 테무진을 부르테와 약혼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타타르족 야영지를 방문했다가 독살당하고 말았다. 두 아내와 10살이 안 된 자식 일곱 명이 남겨졌다. 12세기 당시 초원 지대에는 수십 개 부족과 씨족들이 전투, 사냥, 유목, 약탈, 납치, 교역 등으로 생존을 이어가.. 더보기
예카테리나 2세 어떤 고귀한 이상이든 현실에서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과정과 그 힘을 쓰는 과정에서 투명함이 없으면 이상은 이상으로 현실은 현실로 따로 놀게 마련이다. 역사 속에서 많은 위정자들이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고귀한 이상을 비루한 현실에 적용하려 하였으나 그들 대개는 권력에 눈이 멀어 애초의 고귀한 이상을 잃어버리고 부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냉혹하고 지독한 현실주의자보다 열정적이고 고귀한 이상주의 위정자가 실제 삶을 살아 내는 백성에게는 더 고통스러운 존재였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또한 그런 존재다. 누구보다 고귀한 이상을 가지고 어렵게 권력을 잡았지만 그녀는 눈 뜬 장님과도 같았다. 그녀의 눈앞에서 러시아의 문화가 찬란하게 꽃필 때 러시아 백성들은 얼어붙은 동토에서 가장 참혹한 시대를 맞으며.. 더보기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독일 문학의 최고봉을 상징하는 괴테의 생애를 돌아보면 ‘거인’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80년이 넘는 긴 생애 동안 활동하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베스트셀러에서 [파우스트] 같은 대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도 폭넓은 작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나폴레옹은 1808년에 괴테를 만나고 다음과 같은 묘한 말을 남겼다. “여기도 사람이 있군.” 일각에서는 당대 최고의 영웅이며 천재로 칭송되던 나폴레옹이 괴테를 자신에 버금가는 인물로 인정한 것이야말로 최상의 찬사라고도 여긴다. 젊은 베스트셀러 작가에서 독일 문학의 거장으로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1749년 8월 28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태어났다. 귀족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넉넉한 중산층 집안에서 자라나며 어려서부터 문학과 예술을 가.. 더보기
루이 16세 초췌한 표정으로 한 중년 남자가 마차에서 내렸다. 총검을 든 병사들이 겹겹이 그를 에워싸고, 혁명 광장 중앙에 하늘 높이 치솟은 기요틴을 향해 천천히 몰아갔다. 남자는 이제 마흔이 되려는 나이였지만, 몸과 마음의 고통으로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꿋꿋하게 행동했다. 무시무시한 기계 아래에서, 스스로 저고리를 벗고 손을 묶게끔 팔을 내밀었다. 그리고 마침내 삶의 마지막을 향해 마지막 몇 계단을 오르려던 순간, 광장을 메운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목청껏 외쳤다.“국민이여, 나는 죄 없이 죽는다!”숨이 막히는 듯한 순간, 군악대가 우레처럼 북을 두들겨 그의 이어지는 목소리를 삼켜버렸다. 그러자 왕은 주위 사람들을 향해 지상에서의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나의 죄상을 조작한 사람들을 용서한다….. 더보기
바울 왜 바울인가?시대가 변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것,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이 현실이 되는 일이 허다하다. 금기시되었던 것들이 지당한 일로 받아들여지며, 비정상이 어느새 정상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가 제44대 미국 대통령 선거였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버락 오바마는, 케냐 루오족 출신으로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아버지와 미국 캔자스 주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소위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나 다문화를 경험하고 자란 오바마의 출생과 성장에는 '다양성'이라는 요소가 곳곳에 스며있다. 그는 흑인도 아니고 백인도 아니며, 서양의 환경뿐 아니라 동양의 환경도 경험했다. 그는 1류 학교뿐만 아니라 3류라 .. 더보기
살라딘 살라딘은 1137년, 오늘날의 이라크 티크리트에서 쿠르드 족의 귀족인 나즘 앗 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쿠르드 족이라면 오늘날의 이란, 이라크, 터키 국경 지역의 산악 및 평야에서 살아가는 민족으로, 아직 독립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한동안 이슬람 세계에서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부족에서 오늘날까지도 이슬람 세계의 해방자이며 구원자로 추앙되는 인물이 나왔던 것이다. 살라딘의 본명은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이고, 해석하자면 “욥의 아들이며 정의로운 신앙인 요셉”이라는 뜻이다. ‘살라딘’이라는 이름은 십자군 운동 당시에 그에게 톡톡히 쓴맛을 보았던 기독교인들의 발음을 따른 것이다.(이 글에서는 편의상 ‘살라딘’으로 통칭했다).살라딘 이전의 아랍 세계와 십자군 운동.. 더보기
말더듬이였던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 국왕의 주치의여서 자연히 그는 아버지의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자유롭게 학문을 연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흔히 떠올리는 철학자들의 이미지와는 달리 이 세상의 물건들을 충분히 갖는 것도 행복의 조건으로 봤으며, 호화로운 집에서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며 편안한 생활을 하는 것에도 큰 가치를 두었다. 또 화려한 옷을 입고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머리를 손질하는 등 외모를 치장하는 일에도 신경을 썼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외모가 뛰어났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오히려 보잘것없는 용모를 더 가꾸기 위해 노력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의 눈은 작았고 대머리인 데다 혀가 굳어 말을 더듬거렸다. 키도 작았으며 다리는 가늘었다. 또 그의 성격은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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