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고귀한 이상이든 현실에서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과정과 그 힘을 쓰는 과정에서 투명함이 없으면 이상은 이상으로 현실은 현실로 따로 놀게 마련이다. 역사 속에서 많은 위정자들이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고귀한 이상을 비루한 현실에 적용하려 하였으나 그들 대개는 권력에 눈이 멀어 애초의 고귀한 이상을 잃어버리고 부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냉혹하고 지독한 현실주의자보다 열정적이고 고귀한 이상주의 위정자가 실제 삶을 살아 내는 백성에게는 더 고통스러운 존재였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또한 그런 존재다. 누구보다 고귀한 이상을 가지고 어렵게 권력을 잡았지만 그녀는 눈 뜬 장님과도 같았다. 그녀의 눈앞에서 러시아의 문화가 찬란하게 꽃필 때 러시아 백성들은 얼어붙은 동토에서 가장 참혹한 시대를 맞으며 죽어가고 있었다.
독일 작은 공국의 공녀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 황실의 사람이 아니었으며 더군다나 러시아인도 아니었다. 예카테리나란 이름은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면서 얻은 세례명이고 원래의 이름은 소피 프리데리케 오귀스트로 프로이센과 스웨덴의 접경지인 안할트체르프스트 공국라는 작은 공국의 공녀였다.
그녀의 어린 시절 환경과 신분,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소피는 러시아 차르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다만 그녀의 어머니 요한나가 홀슈타인-고트로프 가문의 먼 친척이었는데 이 홀슈타인 고트로프가문은 스웨덴 왕가로 러시아 황실과도 친척관계였다. 소피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며 성실하기만 한 아버지 밑에서 작은 공국의 공녀다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어머니 요한나가 야심 없는 남편에 답답해하며 소피를 이용하여 권력을 얻을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 결정적으로 소피의 인생항로를 결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넉넉지 않은 형편 속에서도 교양과 체면을 중요시 여겨 프랑스 출신의 가정교사를 들여 소피를 가르치게 했다. 덕분에 소피는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과 합리적인 정신을 가진 소녀로 자라났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여자애와 어울리기보다는 남자애들과 어울리며 말을 타고 놀기 좋아했고 바느질보다는 책을 좋아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극성 속에서 소피는 어린 시절 막연히 황제나 여왕이라는 말이 주는 힘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그녀의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소피는 그녀의 가문만으로 봤을 때는 도저히 대국의 황후자리를 꿈 꿀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는 왕권 안정을 위해 그다지 위세를 부리지 않는 가문의 처녀를 황태자비로 맞기를 원했다. 또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원했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도 독일 출신의 여성을 러시아 황후로 들이게 하려고 공을 들이고 있었다. 거기에 어머니 요한나의 요절한 오빠가 한때 엘리자베타 여제와 친밀한 사이였던 것도 소피가 엘리자베타 여제의 눈에 드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적 계략에 의한 러시아 황태자와의 결혼
표트르 대제의 딸인 엘리자베타 여제는 나이 33세에 쿠데타를 통해 러시아의 왕권을 획득한 인물이었다. 사치스럽고 요염하며 수많은 남자와 염문을 뿌려댄 그녀였지만 정작 결혼은 하지 않아 후사가 없었다. 엘리자베타 여제는 그녀의 조카 카를 울리히를 자신의 후계자로 정했다. 카를 울리히는 스웨덴의 칼 12세의 생질 홀슈타인-고트로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와 표트르 대제의 딸 안나 페트로브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1739년 아버지가 죽자 작위를 물려받아 홀슈타인-고트로프 공작이 되었다. 엘리자베타 여제가 그를 후계자로 삼으면서 카를 울리히는 러시아 황제와 스웨덴 국왕 양쪽 모두의 상속인이 되었다.
엘리자베타 여제는 그 자신이 불안한 정국 속에서 쿠데타로 왕권을 잡은 탓인지 황실의 안정을 누구보다 원했고 카를 울리히를 빨리 결혼시켜 후사를 보고자 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바라는 대로 정치적으로 그다지 영향력이 없는 가문의 딸 소피 프리데리케 오귀스트를 황태자비로 간택했다. 소피는 14세에 러시아로 가서 예카테리나란 세례명을 받고 16살에 훗날 표트르 3세가 되는 카를 울리히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이 결혼은 완전히 실패였다. 카를 울리히는 신경질적이며 반항적인데다 완고했으며 알코올 중독에 예카테리나와의 부부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다고 한다. 홀로 러시아로 온 예카테리나는 고독 속에서 남편에게 무시와 기만을 당하며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였다.
카를 울리히는 예카테리나에게 관심이 없었고 예카테리나 또한 그런 카를 울리히에게 애정을 가질 수 없었다. 명목상 황태자와 황태자비인 채로 두 사람은 각자 정부를 두고 18년간을 함께 살았다. 예카테리나가 낳은 세 아이들도 모두 정부의 소생으로 아버지가 각각 달랐다고 한다. 엘리자베타 여제도 이 사실을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러시아 황실의 안정을 위한 후사일 뿐 누구의 혈통이냐는 어차피 관심 밖이었다. 엘리자베타 여제는 조카인 카를 울리히와는 관계가 나빴지만 예카테리나는 무척총애하였다.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차르에 올라
예카테리나의 남편 카를 울리히는 황제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의 황태자인 스스로의 신분을 망각하고 자신이 자란 프로이센에 대한 해바라기 사랑으로 러시아를 곤경에 빠뜨리는 인물이었다. 그에 비해 외국인인 예카테리나가 더 러시아를 사랑했다. 그녀는 총명하고 야심만만했으며 뛰어난 지식과 유연한 성격, 러시아에 대한 애정으로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녀는 러시아어를 완벽하게 배웠으며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였고 러시아 역사에 통달하였다. 더불어 유럽의 계몽 사상가들과 교유하면서 러시아를 더 좋은 나라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자연스레 황태자의 인기는 땅에 떨어지고 황태자비에 대한 국민의 사랑은 열광적이 되었다.
1762년 옐리자베타 여제가 죽고 카를 울리히는 표트르 3세로 러시아 황제 자리에 올랐다. 당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및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을 상대로 7년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황제에 오른 후 표트르 3세는 거의 다 이긴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불리한 조건으로 중단하고 프리드리히 2세와 동맹을 체결했다. 거의 빈사 상태에 있던 프로이센은 표트르 3세의 프로이센 사랑 덕에 간신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표트르 3세는 자신이 통치하는 러시아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자신이 태어난 프로이센에 대한 애정을 숨김 없이 드러냈으며 러시아 황실에 프로이센 세력을 끌어들이는 등 어리석은 행동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명예를 떨어뜨렸다. 러시아의 귀족과 백성들은 표트르 3세의 실정에 불만을 품었다.
야심가였던 예카테리나는 남편 표트르 3세가 러시아를 통치할 능력이 없다는 점이 분명해지자 귀족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스스로 러시아를 통치할 계획을 차근차근 실천해가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군대는 그녀를 지원했으며, 당시 그녀의 정부였던 오를로프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그녀가 지시를 내리면 바로 일어날 여러 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녀는 궁정의 인물들과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지식인, 일반 대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마침내 1762년 7월 예카테리나는 자신의 휘하에 모인 군대를 이끌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스스로 러시아의 여제가 되었다. 놀란 표트르 3세는 예카테리나에 맞설 군대를 모으려 했으나 이미 많은 군대는 예카테리나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결국 표트르 3세는 즉위 6개월 만에 아내에게 왕권을 강탈 당했다. 그리고 8일 후 예카테리나 정부의 손에 암살당했다. 1762년 9월 예카테리나는 모스크바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하고 예카테리나 2세로 러시아 차르가 되었다.
탁상공론으로 그치는 이상적인 대민정책
예카테리나 2세는 원래 고귀한 이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당시 유럽에 급속히 퍼지기 시작한 계몽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이전의 일방향적인 지배층의 피지배층에 대한 착취를 반성하고 러시아 백성들을 더 잘살게 하겠다는 투지로 불탔다. 그러나 그녀가 때때로 내놓는 대민정책은 너무도 이상적이어서 실행되지 못한 채 탁상공론으로 그치는 것이 많았다. 예카테리나 2세의 교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러시아 헌법은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가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급진적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 헌법은 실제로 쓰여지지 못한 채 헌법을 제정했다는 의의만 남기고 사문화되었다. 예카테리나 2세의 고귀한 이상에 비해 그녀의 현실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귀족들의 지지로 차르에 오른 그녀는 불안한 왕권을 유지하게 위해 귀족들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이권을 주어야만 했다. 그녀가 귀족들에게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고귀한 이상과는 정반대로 배치하는 러시아 백성들, 즉 농노들에 대한 더 가혹한 착취의 권리였다.
견디지 못한 러시아 백성들이 봉기하여 1773년 푸가초프의 난이 일어났다.푸가초프는 돈카자흐 출신으로, 프로이센과의 7년전쟁, 폴란드전쟁, 러시아·터키전쟁 등 세 차례의 전쟁에 종군한 군인이었다. 그는 러시아 각지를 방랑하면서 농노들의 참혹한 현실과 불만을 보았다. 푸가초프는 스스로를 죽은 표트르 3세라고 사칭하며 농노제를 반대하는 세력을 규합하였다. 우랄에서 시작된 푸가초프의 반란은 순식간에 각지로 퍼져서 카잔·펜자·사라토프 등의 도시를 함락시키고 러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푸가초프군은 각지에서 지주를 붙잡아 재판하여 그 재산이나 토지를 농민에게 줌으로써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이 푸가초프의 난은 예카테리나 2세의 잔혹한 진압작전에 밀려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번에도 예카테리나 2세가 선택한 것은 러시아의 백성이 아니라 그녀의 친위 귀족들이었다. 그녀가 차르가 되기 전 꿈꾸었던 새로운 러시아는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그녀의 치세가 완전히 암흑의 시간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표트르 대제 이후 가장 부강한 러시아를 만든 인물이기는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전쟁을 통해 러시아 영토를 넓혔고 낙후되었던 러시아의 문화를 유럽과의 교류를 통해 향상시켰다. 지금은 에르미타쥬 박물관이 된 겨울궁전에 모인 미술품들은 모두 예카테리나 2세 치세에 모인 것들이었다. 눈에 보이는 러시아의 부강은 수천만 러시아 백성들의 고통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예카테리나 2세는 자신의 고귀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정확히 진단하지 못한 채 권력에 파묻혀있었다. 현재 예카테리나 2세에게 붙여진 ‘대제’라는 칭호도 그녀가 외면하였던 러시아 백성들의 눈물 속에서 가능한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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