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 안정기의 공화정 로마
기원전 616년에 촌락 같은 작은 도시에서
출발한 로마는 에트루리아인의 지배하에 있었다. 에트루리아인은 약
100년간 로마를 지배했는데, 기원전 510년에
로마인이 반란을 일으켜, 치열한 전쟁 끝에 에트루리아인 왕을 추방했다.
이 시기에 시민의 대표자들이 만든 '원로원'이
정무의 최고 명령권을 갖고 집정관(執政官) 두 사람을 선출하는 로마 공화정 체제가 구축되었다. 로마인들은 왕정(王政) 타파를 자랑스러워했고, 전투에 대한 얘기는 전설처럼 전해졌으며 로마인들은
전제주의(專制主義)의 잔재가 남아 있는 사람들을 싫어하게 되었다. 공화정 로마는 착실히 힘을
키워 적들을 제거해 나갔다. 카이사르가 탄생한 기원전 100년의
로마는 지중해 세계의 승자였지만 내외부적으로 주변에 많은 적들이 있었다.
카이사르가 탄생했을 무렵에 평민 출신의 장군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로마의 최고위 공직인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기원전 115년에 법무관 선거에 당선된 마리우스는 카이사르의 고모
율리아와 결혼했으므로 카이사르에게는 고모부가 된다.
가이우스 마리우스, 그의 부하 장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와 술라는 카이사르의 소년기를 격동으로
물들인 인물이다. 특히 술라는 사후(死後)에도 카이사르의 적으로서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태생 - 율리우스 일가
영어로 줄리어스 시저라 불리는 시저의 정식 라틴어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서
가이우스는 남자에게 흔히 붙이는 명칭이었다. 율리우스는 가문, 카이사르는
가명(家名)에 해당한다. 가이우스라는 이름은 세습되기 때문에 여기서 설명하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버지도 이름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잔혹한 독재정치로 악명 높던 로마의
제3대 제왕 카라칼라도 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이다.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는 현재의 로마보다 내륙에 있던 알바 왕국의 왕족 혈통인데, 율리우스
일가는 이 왕국의 유력자로서 명문 귀족이었다. 카이사르가(家)는 율리우스 일문의 직계라고 할 수는 없고 비교적 후대의 가명(家名)이다. 카이사르 가문은 가이우스라는 이름을 세습하는 가족과, 루키우스라는 가족으로 나뉘게 된다.
카이사르의 아버지는 법무관이었다. 법무관은 집정관 다음가는 공직이지만, 가이우스가의 힘으로는 최고위직 집정관이 될 수는 없었다. 이처럼
가이우스 집안은 같은 가문인 루키우스 집안에 비해 힘이 약했는데, 정략 결혼으로 그럭저럭 명문 귀족의
체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의 친정은 출세한 사람이 많은 명문이며, 학자 집안이라 그녀도 상당히 교양 있는 여성이요 보기 드문 현모(賢母)였다.
군사쿠데타 - 집정관에 의한 수도 제압
집정관이 된 마리우스는 우선 시민군이던 로마군(軍)을 직업군인 기구로 개편하는 군정 개혁을 단행했다. 그
당시까지 로마군은 징병에 의해 조직되었다. 패배를 모르는 장군으로서 영광을 누렸던 마리우스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위세가 점차 떨어지고 있었는데, 병역 의무에서 시민들을 해방하고 실업자들에게 군인이라는
직업을 주어 로마 서민층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휘하의 군대를 지휘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마리우스의 새로운 비약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하였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마리우스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마리우스와 술라는 원정의 지휘권을 놓고 싸웠는데, 오리엔트(소아시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에 대한 원정 지휘권을
마리우스가 수중에 넣어 당초 총사령관에 선출되었던 술라가 이를 찬성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원전 88년에 집정관에 임명된 술라는 이 해에 캄파니아의 노라에 주둔한 군대를 움직여
수도 로마로 진군했다. 집정관이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진군한다는 것은 로마인들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비난을 퍼부었으나 술라의 군대는 시민들을 학살하고, 일부에서는 불을 질러 약탈행위를 자행하기도 했다. 수도는 몇 시간
만에 제압되었고 마리우스는 로마에서 도망쳤다.
유혈 - 마리우스의 복수와 술라의 공포정치
군사 쿠데타로 오리엔트 원정의 지휘관으로 복귀한 술라는 오리엔트를 평정하고 그리스까지
진군해 그리스 전역을 항복시켰다. 술라가 없는 로마(기원전 89~84)에서는 집정관 루키우스 킨나가 마리우스파(派)임을 표명하고 원로원의 다수파를 장악하여 기원전 87년에
도망 다니던 마리우스를 불러들였다.
그 무렵 아프리카에 있던 마리우스는 병력 6천 명을 이끌고 로마로 귀환하여 두 번째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분노에 찬 마리우스는 원로원 의원 50명, 기사계급 1천 명을 순식간에 학살했고 희생자들 중에는 집정관이었던
옥타비우스도 끼여 있었다. 옥타비우스의 죽음은 집정관이 같은 로마인에게 죽음을 당한 첫 번째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카이사르의 큰아버지가 두 사람이나 희생되었다. 마리우스도 또한 카이사르의 친척이었기
때문에 아직 열세 살인 소년 카이사르에게 충격은 매우 컸다. 카이사르가 처음으로 목격한 '유혈의 복수전'이었던 것이다.
복수는 대학살로 끝이 났고 이듬해에 마리우스는 킨나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지만 임기를 시작한 지 13일
만에 열병으로 죽고 말았다.
마리우스의 후계자임을 자인하는 집정관 킨나는 점차 서민들의 호응을 얻게 되었고, 정권은 '민중파'가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카이사르는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였다. 마리우스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원로원파' 사람들이 술라의 진영으로 망명하는 가운데, 집정관 킨나는 머지않아
로마로 돌아올 술라에 대비하여 방위군을 정비했다. 하지만 킨나는 군대 편성의 혼란에 휩싸여 목숨을 잃고
만다.
기원전 84년, 드디어 술라가 로마 귀환을 시도하고 2년에 걸친 내전이 벌어진다. 카이사르의 소년 시절도 끝이 났다.
술라의 군대에는 훗날 카이사르와 깊은 관련을 맺는 인물들이 있었는데, 우선 훗날 로마 최고의
갑부가 된 서른한 살의 마르쿠스 크라수스를 들 수 있다. 마리우스의 손에 아버지와 형을 잃은 그는 도망갔던
스페인에서 합류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마리우스파에게 아버지를 잃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이 당시에 스물세 살이던 폼페이우스는 자신이 편성한 3개 군단을
이끌고 있었는데, 그의 천재적 기질은 카이사르를 능가했다. 그들이
참가하는 술라의 총 병력은 7만 5천이었다.
술라의 군대를 맞아 싸우는 '민중파'의 전력은 12만이었지만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집정관 두 사람은 노르바누스, 스키피오 순으로 잇달아 패하여 포로가 되고 만다. 킨나의 협력자
카르보는 마리우스의 장남과 함께 술라에 맞서지만 지고 말았다. 이 전투가 있은 다음날 이른 아침에 술라는
로마로 입성했다. 마리우스의 장남은 전사했고, 임시 집정관
카르보는 자살했다.
로마에 입성한 술라의 대학살이 시작되니, 이것이 카이사르가 목격한 두 번째 대학살이었다. 로마 시는 내전 피해는 없었지만 입성한 술라에 의해 시내는 피의 강이 흐를 정도였고, 그 참상은 술라조차도 로마를 정치 중추로 삼는 것을 재고(再考)하게 만들 정도였다고 한다. 술라는 냉정한
합리주의자였으며 빠른 판단력과 실천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가 목표로 한 것은 마리우스파의 근절(根絶)이었고, 그것은 질서 있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술라
술라는 역사에 이름에 남길 만한 대단한 자질의 소유자였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한 청년 시절을 보냈는데, 품성이 천박하지는
않았다. 군사적 재능도 뛰어나 일단 적과 맞서면 반드시 승리하고야 말았다.
그는 결단력이 빠르고 냉정하게 행동했는데, 군사(軍事)는 그 재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분야였다. 이
당시의 로마는 개혁파인 '민중파'와 보수파인 '원로원파'라는 2대 세력이
존재했다. 카이사르의 고모부 마리우스는 '민중파'였고 술라는 '민중파'를
타파하려는 '원로원파'의 선봉에 서 있었는데, 이것이 술라와 카이사르가 대립하는 원인이 된다.
긴 충전기 - 청년 시절
술라는 반대파들을 효율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민중파'로 간주한 사람들 수천 명(수만 명이라고 한다)의 이름을 명부로 만들어 공고했는데, 이는 민중파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민중파'로 지목받은 카이사르는 가까스로 로마를 탈출하여 소아시아 서안에 도착한다. 소아시아 총독 마르쿠스 미누치우스 테무르스의 군대에 은신한 카이사르는 첫 임무로서 비티니아 왕국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임무는 무사히 달성했지만 비티니아 왕 니코메데스의 궁정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동성애자로
소문난 니코메데스와 어울렸다는 추문에 휘말리게 된다. 로마는 동성애에 관용적이지 않았기에 이 추문은
평생 카이사르를 따라다닌다.
얼마 후 카이사르는 소아시아 남안의 키리키아 지방에서 근무한다. 로마의 술라는 여전히 건재해
아직은 로마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 지방의 세르빌리우스 익사리우스 총독 밑에서 카이사르는 후한 대우를
받았으나 곧 제대했다. 로마로부터 술라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서둘러 로마로 돌아갔다. 기원전 78년, 4년 만에 로마 땅을 밟은 카이사르는 스물두 살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술라는 죽었지만 그의 자취는 아직 커서 민중파인 카이사르가 뜻을 펴기는 어려웠다. 카이사르는 변호사로 개업해 원로원파와 싸웠지만 실패했다. 카이사르는
아주 오랫동안 술라의 망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원로원파' 세력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카이사르가 로마로 돌아온 2년 후에 그보다 여섯 살 위인 서른 살의 폼페이우스는 4만의 병력을 이끄는 총사령관으로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한편, 카이사르는 술라파의 미움을 사서 다시 국외로 도망하게 된다. 그는
최고의 유학지로 알려진 로도스 섬으로 향했다.
카이사르의 해적 퇴치
카이사르가 로도스 섬으로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는 파르막사 섬 근처에서 유명한 키리키아 해적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느긋한 그의 성격이 여기서 운 좋게 작용했다. 그는 겁내는 기색도 없이 자기의 몸값을 올려 대우를 보증하게 하였고, 해적들과 섞여 무술 훈련 등을 하면서 돈이 도착할 날을 기다렸다. 석방된 카이사르는 곧 배를 모아 해적이 숨은 장소를 급습하고 소아시아에 속한 주총독으로부터 처치를 일임받고는 해적들을 모두 사형시켰다. 카이사르의 해적 퇴치에 관한 얘기는 그리스에서 영웅담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무위(無爲) - 쉽지 않은 출세
로도스 섬에서 교양을 익히며 유유자적하게 시간을 보내던 카이사르는 얼마 후 신기관(神祇官, 하늘의 신과 땅의 신을 섬김)으로 임명되어 로마로 돌아온다. 카이사르는 스물일곱 살에 로마 군대의 대대장으로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는데,
6개 대대 600명을 통솔하는 지위이긴 하지만 크게 출세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출세는 이때까지는 아직 순조롭지 않았던 것이다.
카이사르는 그 당시 오히려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 있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자그마치 '10개
군단 이상의 병사들을 1년 동안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의 액수'였다고
한다. 그 돈을 책값, 유흥비, 옷값 등에 탕진했다. 특히 패션에 대해서는 공식석상에서 입는 장의(長衣)를 좋아했고, 평상복 단의(短衣)도 디자인을 궁리할 정도였다. 수많은 여인들에게
값비싼 물건을 선사하기도 했다. 이 빚더미에 앉은 사나이는 우습게도 재무관으로 스페인에 부임하는데, 재무관은 로마의 속주(屬州)를 통치하는 총독직 밑이며 재무와 공문서를 관리하는 직책으로서 로마 원로원의 첫 번째
공직이었다.
정계의 공식 무대 - 삼두정치로
카이사르가 부임지에서 가데스 시의 헤라클레스 신전에 들렀을 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상 앞에서 '벌써 알렉산드로스가 세계를
지배했던 나이가 되었건만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며 통탄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그날 이후로 그가 갑자기 변한 것은 아니다.
재무관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와서도 카이사르의 방탕한 생활은 여전했다. 그러나 재무관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가 서른다섯 살 때 집정관, 법무관 다음가는 안찰관(按察官)에 임명된다. 나이를 생각하면 그리 빠른
출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독특한 안찰관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안찰관은
로마 시의 가로(街路)와 수도를 관리하고 또한 공적인 행사를 제공하는 공직인데, 카이사르는 로마의
주요 간선 아피아 가도(街道)를 복구하고 또 검투사 시합을 개최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이 사업들을
카이사르는 모두 자비, 즉 빚으로 시행했다. 그 금액은 어마어마했지만
대신에 귀중한 서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빚지는 것을 전혀 겁내지 않는 이 불가사의한 정신 구조의 카이사르는 돈을 빌려 선거 자금으로 썼고,
종교의 최고 책임자 최고 신기관 자리에 오른다.
원로원 의원이 된 카이사르는 그를 경계하는 보수파 세력의 음모와 몇 건의 스캔들을 보기 좋게 피해갔다. 재판이 주요 업무인 법무관직 임기가 채 끝나지 않은 채 속주(屬州) 총독이 된 카이사르는 재무관 시절부터 인연이 있는 스페인 남부로 부임해 갔다. 속주 총독은 법무관직과 동격이었지만 속주 총독은 군단을 지휘할 수 있었다. 서른아홉
살 때 마침내 카이사르는 정계의 공식 무대에 서게 되었다.
속주 총독을 마치면 로마 공직의 최고위 집정관이 되는 것도 요원한 꿈은 아니었다. 1년
후에 무사히 귀국한 카이사르는 집정관이 되고자 행동을 개시했다. 영예로운 개선식(凱旋式)도 포기하고 집정관 선거에 입후보했고 당선을 굳히기 위해 폼페이우스와 접촉했다. 폼페이우스
지휘하의 병사들 표가 있으면 카이사르는 보수파인 '원로원파'의
대립 후보를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협조를 얻기 위해 집정관에 취임하면 폼페이우스의 옛
부하에게 농지를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다. 폼페이우스의 승낙을 받자 그 다음에는 로마 최고의 갑부이며 카이사르의
최대 채권자인 크라수스를 설득한다. 이른바 유명한 '삼두정치'가 성립되는 찰나였던 것이다.
이민족과의 전쟁 - 갈리아 전쟁
당초에는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세 사람이 연합했다는 사실을 외부에 숨기고 있었으나 이 담화는 확실히 주효해 카이사르는 압도적 다수로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의 권한으로 즉시 변혁에 착수했다. 먼저 의사(議事)의 내용을 게재한 의사일보(議事日報)인 대자보를 작성하여 밀실이던 원로원 회의를 일반 시민들에게 숨김없이 공개했다. 그 다음에는 많은 선배들이 실패한 '농지법'을 성립시켰다. 기득권의 침해를 겁내는 보수파 세력에게 '농지법'은 반체제 운동으로 여겨졌다.
보수파인 '원로원파'의 반대의 원성이 높았는데, 카이사르는 시민들로부터 얻은 자신감과 폼페이우스의 인기를 활용해 시민 집회에 모인 군중들을 열광시켰고, 반대파를 단상에서 쫓아냈다. 이것이 바로 시민 앞에서 밝혀진 '삼두정치'의 절대적 효력이었다. 또
한 사람의 집정관인 비브루스는 카이사르 때문에 무력화되어 의욕을 잃었으므로 카이사르는 집정관의 임기 1년
동안을 혼자서 충분히 활용했다.
집정관 임기 동안 자신의 구상을 현실화한 카이사르는 임기를 마치고 라인 강 서쪽, 현재의
서유럽에 해당하는 갈리아 지방의 속주(屬州) 총독이 되어 부임했다. 카이사르는 자기가 로마를 떠나 있는 동안에 뒤탈을
없애기 위해 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에게 시집보내 결속을 더욱 튼튼히 했다.
카이사르가 부임했을 당시의 남부 갈리아는 로마의 속주로서 안정된 상태에 있었지만, 중부
및 북부에서는 동방에서 침입해 오는 게르만족의 압박으로 갈리아 부족들 사이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했다. 갈리아인들은
부족 간의 단결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게르만족들은 약탈 행위뿐 아니라 갈리아인들끼리의 분쟁을 이용하기도 했다.
게르만족에게 거주지를 빼앗긴 갈리아인들은 난민이 되어 다른 부족의 땅으로 도망쳤고, 난민들의
이동은 다른 부족과의 말썽을 동반했다. 그런 와중에 헬베티족이 세콰니족 및 아이두이족과 충돌한다. 아이두족에게 원군(援軍) 요청을 받은 카이사르는 헬베티족을 공격하여 후퇴시키기 위해 전투에 개입했다.
카이사르는 항복하는 자에게는 관용을 베풀었지만 계속 저항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군단 전체를 동원해 싸웠다. 약 40만 명으로 이동을 개시했던
헬베티족 중에서 원래의 거주지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10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카이사르의 적이 되는 것은 게르만족의 두목 아리오비스투스였다.
전격작전 - 카이사르의 전법(1)
카이사르의 특기는 재빠른 행동에 의한 전격(電擊)작전이었는데, 이 게르만족과의 전투에서도
그 실례를 볼 수 있다. 아리오비스투스의 병력에 바짝 다가간 카이사르는 회담이 결렬되자 당장 공격을
개시했다.
카이사르는 게르만측이 부족의 점성술 때문에 결전을 망설이고 있다는 정보를 얻자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로마 군단은 조직화되지 않은 게르만 병사들을 압도했다. 승리에 결정적 공을 세운 것은 카이사르의 최대 채권자인 크라수스의 아들이었다.
패배한 아리오비스투스는 작은 배를 타고 라인 강 동쪽으로 도주했다.
기원전 57년, 이번에는 갈리아 북부의 벨기에인이
문제를 일으켰다. 로마군의 다음 표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벨기에인들이 카이사르에게 선제공격을 가하려
한 것이다.
다른 갈리아인들과 달리 벨기에인은 잘 단결했으며 총 병력은 약 40만이었다. 카이사르의 병력은 원로원이 승인한 4개 군단과 자비로 창설한 4개 군단. 여기에 용병(傭兵), 현지 병을 합쳐도 6만이 채 못되었다. 카이사르는 이 새로운 적에게도 전격작전을 이용했다. 신속히 적의
영내로 진격하여 진영지를 설치하고 벨기에인 30만을 맞아 싸웠다. 적은
로마군의 약 5배였지만 선수를 친 로마군이 유리했다.
견실하게 싸우면서 카이사르는 게르만족과의 전투 이후에 동맹관계에 있는 아이두이족을 후방을 교란시키는 유격대로 사용했다. 카이사르는 군사적 재능면에서는 폼페이우스에 뒤떨어졌지만 정치를 전략(戰略)에 이용하는 재능이 탁월했다. 동맹을 맺은
이민족 부대를 직속 군단과 마찬가지로 잘 활용했던 것이다. 아이두이족에게 본거지를 공격당한 베로바치족은
전투를 계속할 수 없었다. 부족 연합 중에서 최강이었던 베로바치족이 철수하자 벨기에인들은 안절부절 못하고
도망갈 태세를 취했고, 카이사르는 승리했다.
궁리와 지략 - 카이사르의 전법(2)
벨기에인의 총대장 갈바는 스에시오네스족 출신이다. 그의
본거지인 노비오드눔을 공략할 때 카이사르가 지휘하는 로마 군단은 그들의 발달된 토목 기술을 잘 발휘하였다. 군단은
상황에 따라 즉석에서 공병대가 될 수 있었다. 대규모 야영지를 세우고 다리를 놓고, 공성전(攻城戰)에서는 거대한 병기를 순식간에 만들어 냈다. 그 공성 병기를 목격하고 갈바는
순순히 항복했다.
카이사르는 전투를 거듭하며 갈리아 지역 제패를 착실히 이루어갔다. 배를 잘 다루는 대서양안의
베네티족과 싸울 때는 로마군의 장기인 백병전(白兵戰)―로프를 감아 돛대 위에 건너지른 활대를 꺾고 적의 배로 옮겨 타는―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게르만족의 한 씨족인 시칸브리족과의 전투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라인 강에 다리를 놓았다. 이것은
실리(實利)와 선전(宣傳)을 겸한 그야말로 카이사르다운 일이었다.
카이사르는 로마인들에게 전혀 낯선 브리타니아(현재의 영국)로
두 번 원정했는데, 브리타니아인들은 전신을 파랗게 물들이고 전차와 기병으로 파상(波狀)공격을 하며, 숲 속에서 펼치는 게릴라전에 능했다. 카이사르의 병사들에게 그들은 어쩐지 맞서 싸우기 기분 나쁜 상대였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브리타니아에서도 카이사르는 승리하여 적의 총대장 카시베라누스를 항복시켰다.
갈리아에서는 우호적이었던 에브로네스족의 배반으로 1개 군단을 통째로 잃은 적도 있었다. 그래도 카이사르의 갈리아 부족 제압은 그치지 않았다.
수도 내의 적 - 갈리아 전쟁 종결
강력한 지도력을 지닌 오베르뉴족 출신의 베르킨게토릭스가 갈리아 여러 부족들을 결속시켜
로마군에 저항했다. 카이사르는 첫 전투에서 다소 출발이 늦긴 했지만 이 일대 봉기를 착실히 제압했다. 카이사르는 알레시아 고지마을의 성에 머물러 있는 베르킨게토릭스를 특기인 대규모 토목공사로 구축한 요새 같은
포위망으로 둘러싸, 외부와 내부의 갈리아군을 격파하고 베르킨게토릭스를 항복시켰다.
갈리아 전쟁 7년째에 일어난 이 베르킨게토릭스와의 전투가 끝나면서 카이사르의 갈리아 지방
평정은 거의 끝나갔다.
하지만 카이사르에게는 그를 위험인물로 여기고 실각시키려는 로마의 '원로원파'와의 싸움이 남아 있었다. 카이사르가 강적 베르킨게토릭스와의 싸움에
열중하고 있을 무렵 로마에서는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를 갈라놓으려는 공작이 시작되고 있었다. 크라수스는
기원전 53년에 원정지 파르티아에서 전사(戰死)했으므로 폼페이우스를 카이사르에게서 떼어놓으면 삼두정치는 해체되는 것이었다. 보수파인 폼페이우스는 '원로원파'의
설득으로 그들 편에 서게 된다.
갈리아 지방을 평정한 카이사르가 집정관 재선을 노릴 것으로 예상한 '원로원파'는 그를 무력화하기 위한 여러 함정을 준비해 두었다. 집정관에 입후보하려면
본인이 시내에서 신고해야 하는데 속주(屬州) 총독은 로마에 들어가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카이사르는 군대를 해산시키고 개인적으로 들어가야 했다. '원로원파'는 이 점에 주목했다.
내란 - 폼페이우스와의 대결
원로원파는 그 기간에 카이사르를 고발하여 법정에서 단죄하면 이 위험인물을 실각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카이사르는 임지인 갈리아 지방에서 원로원의 인가를 얻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한
일이 많았는데, 이 죄를 묻고 재판을 길게 끈다면 카이사르가 입후보하는 것을 저지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카이사르는 군사력이 없는 채 '원로원파'와 맞서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속주 총독의 임기 연장을 요청했지만 기각되었다. 강경한 반(反)카이사르파이며 보수파 집정관인 마르케루스는 폼페이우스에게 전군의 편성권과 최고 지휘권을 주며 카이사르를 격파할 것을
명령했다. 북이탈리아의 라벤나에서 이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갈리아에 주둔중인 자신의 군단을 불러모았다. '원로원파'는 비장의 카드인 '원로원
최종 권고'를 제시하며 원로원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카이사르를 국가의 적으로 간주했고 이로써 내전이
불가피해졌다.
본국과 속주의 경계선인 루비콘 강을 군대를 이끌고 건너면 술라와 마찬가지로 국법을 어긴 자가 된다.
하지만 그대로 기다리고 있으면 로마 정규군에 의해 카이사르는 매장당하고 말 상황이었다.
로마의 지배 영역은 확대되어 새로운 통치의 청사진이 필요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과
기득권에 집착하는 원로원 보수세력은 개혁을 지향하는 자들을 말살하려고 했다. 이것이 구식화된 로마 과두정치(寡頭政治)의 무서움이었다. 속주의 총독은 자기 군단을 수족처럼 이용할 수 있어 혹시라도
권력만을 탐하는 지휘관이 수도를 공격하면 폭정자의 출현도 얼마든지 가능했던 것이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이 주체가 되는 과두정치가 이미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음을 경험을 통해 확신하게 되었고, 그래서 손수 개혁을 현실화하고 싶었다. 법을 어기는 것을 주저하고
있던 카이사르도 마침내 '신들과 적이 기다리는 장소로 진격하라.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며 군대에게 강을 건너라고 명령한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카이사르 나이 쉰 살 때였다.
이때 카이사르 휘하 병력은 1개 군단에도 미치지 않는 4천 5백 명이었지만 행군 속도를 빨리하여 수적인 불리함을 보충하였고, 대응이
늦은 폼페이우스측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전격 작전을 성공시켰다. 진격 중이던 주요 도시들을 차례차례로
공략하고 순식간에 수도 로마까지 3일 만에 육박한 카이사르의 군단(軍團)을 보고 '원로원파'는 공포에 떨었다. 군단을 배비(配備)하지 않은 수도에는 방위력이 없다. 폼페이우스는
수도에서 탈출했고 이어서 집정관 두 사람과 반카이사르파의 원로원 의원 다수가 로마를 버리고 도망쳤다. 카이사르는
속공(速攻)으로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폼페이우스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반격할 틈을 주지 않았다. 폼페이우스와
반카이사르파 원로원 의원이 본국을 버리고 그리스로 도주해 카이사르는 이탈리아 반도와 수도 로마를 장악하게 되었다.
로마의 대외 방위는 심복 안토니우스에게 맡기고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지반인 스페인 제압을 개시한다.
반년 동안에 스페인 내의 폼페이우스군을 모두 해체하고 스페인을 재패한 카이사르는 돌아온 수도 로마에서 집정관이 부재일 때 선출되는
독재관(=非常職)이 되었다.
암살 - 종신 독재관
독재관의 권한으로 선거운동을 하고 문제 없이 집정관에 오른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대결하기
위해 그리스로 출발했다.
폼페이우스는 드라키움 남부의 공방전(攻防戰)에서 천재로 불린 젊은 날을 방불케 하는 전투를 벌였다. 그때까지 완벽을 자랑하던 카이사르의 포위진을 격파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의기소침하지 않았고 그 반격은 신속했다.
사기가 오른 폼페이우스 군단을 파르사르스 평원으로 유인해 결전을 벌였다. 카이사르는 정석
작전, 즉 기병에 의한 포위 작전을 포기하고 적군의 기병대 말을 가벼운 복장의 보병으로 교란시키는 전술을
펼쳐 수적으로 앞서는 폼페이우스 군단에게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
카이사르는 패하여 달아나는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로 향했는데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기 전에 암살당했다. 이집트의 왕위 계승 다툼에 휘말린 카이사르는 소년 왕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승리하여 그를 전사(戰死)하게 한다. 왕녀 클레오파트라 7세와 마지막 왕자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공동
통치자로 삼은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의 사이에 아들 카이사리온을 두었다.
알렉산드리아를 출발한 카이사르는 소아시아의 절반을 공략한 폰투스 왕 파르나케스를 카파도키아 지방의 제라에서 간단히 물리치고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전과보고(戰果報告)를 로마의 원로원에 보냈다.
수도로 개선한 카이사르는 다시 한번 독재관에 임명되는데, 독재관의 통상임기는 반년이지만
기원전 46년에 카이사르가 취임한 독재관 임기는 10년이라는
이례적인 기간이었다.
도시 국가에서 초대국(超大國)으로 성장한 로마를 생각할 때 카이사르는 그때까지 항상 그랬듯이 새로운 질서를 구상했을
것이다. 아프리카 전쟁에서의 타프수스 전투, 스페인의 문다
전투에서 승리한 카이사르는 이 승리로 폼페이우스 잔당(殘黨)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았다. 이리하여
이상을 실현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구제(救濟) 사업, 도로 건설 등의 사회정책이나 '율리우스력(曆)'에 의한 달력 개정 등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얼마 후 종신
독재관으로 임명된 카이사르는 공화제를 해체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그가 왕정(王政)을 원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카이사르의 적에게는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는 게 중요했다.
카이사르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자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이행한 로마 국민들은 '왕정'이라는 말에 매우 민감했기에
그에 대한 거부 반응은 카이사르의 예상 이상이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설립한 극장 근처의 대회랑에서 카시우스 롱기누스, 마르쿠스 브루투스
등이 주동이 된 공화정 옹호파들의 칼에 찔려 쓰러졌다. 기원전 44년 3월15일, 카이사르 나이 55세 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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