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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ry/해외

나폴레옹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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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생애와 프랑스 혁명군 시절


나폴레옹 1세는 이탈리아 제노바에 기원을 두고 있는 코르시카 소귀족 출신의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 즉 이탈리아어로 카를로 마리아 디 부오나파르테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바로 1년 전 그의 고향 코르시카는 1768년 루이 15세 치세하에 프랑스에 병합되었으며, 그가 태어날 때에는 이탈리아어로 나폴레오네 디 부오나파르테라 불렸다.


모친 레티지아의 엄격한 규율 아래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아홉 살이 지난 1779년 1월 코르시카를 떠나 오툉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의 교사였던 샤르동에 의하면 나폴레옹은 조용하고 사색적인 학생이었으며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보통 홀로 산책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사실 코르시카 방언만 아는 나폴레옹에게 프랑스어는 외국어였고, 자연스레 프랑스 학생들과 어울리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5월 나폴레옹은 브리엔르샤토 군관 학교에 입학하였고 문학과 어학보다는 수학 쪽으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여기에서 나폴레옹은 이후 그의 비서가 될 루이 앙투안 포블레 드 부리엔만을 친구로 만났다.


1785년 9월 군관 학교를 졸업한 후 나폴레옹은 11월부터 라 페르 포병 연대 소위로 임관하여 복무하게 되었으나 1789년 프랑스 혁명 소식을 듣고 자코뱅파 지지자가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열렬한 코르시카 민족주의자였던 나폴레옹은 당시 코르시카 민족운동 지도자였던 파스쿠알레 파올리에게도 지지를 보냈다. 여러 차례 개인적으로 코르시카를 방문했던 나폴레옹은 1792년 혁명정부 아래에서 코르시카 제2 의용대대의 지휘권을 부여받아 혁명전쟁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는 그는 영국식 입헌군주정을 추종하는 파올리와 여러모로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고 결국 1793년 마르세유로 피신하게 되었다.





다시 정규군 대위로 편입된 나폴레옹은 자코뱅 혁명정부의 열렬한 지지자로 활동했고, 군인으로서도 툴롱 공성전 등을 통해 중앙집권적인 자코뱅 정권에 반대하는 연방주의자들이나 왕당파 세력들을 제압했다. 1794년에 그는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자코뱅 정권이 몰락하고 온건한 총재정부가 들어서자 잠시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풀려난 이후에는 방데 전선에 배속되었으나 건강을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이 때문에 잠시 한직으로 물러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1795년 10월 5일에 발생한 왕당파 반란을 파리 시내 포격으로 과감하고도 잔혹하게 진압함으로써 총재정부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1796년 나폴레옹은 연인 데지레와 헤어지고 귀족 미망인이었던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 결혼한 후 본격적으로 이탈리아 원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북부 이탈리아에 대한 선제공격을 통해 이곳을 통한 오스트리아의 공격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피에몬테를 2주 만에 돌파한 그는 1797년 1월까지 북부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오스트리아군을 궤멸시켰다. 이후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까지 진격해 나갔고 오스트리아 정부는 수도 빈이 위험해지자 뢰벤 조약과 캄포 포르미오 조약을 통해 프랑스에 북부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지역을 할양하였다. 나아가 그는 오스트리아와 연합한 베네치아를 정복하였는데 이는 베네치아가 탄생한 1100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스물여덟 살의 젊은 장군이 이루어낸 놀라운 전승 소식은 프랑스에서 그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들을 양산해 냈다. 나폴레옹의 인기가 높아지자 총재정부는 그의 정치세력화를 염려하여 국민들의 시선에서 멀리 떼어 놓고자 하였다. 이에 총재정부는 영국과 인도를 연결하는 길목을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나폴레옹에게 이집트 원정을 명령했고, 1798년 5월 나폴레옹은 5만 5천 명의 병력과 167명의 과학자들을 대동하여 이집트로 떠났다. 6월 몰타 섬을 점령한 후 7월 1일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한 나폴레옹의 군대는 곧 기자의 피라미드 전투에서 마물루크 왕조의 군대에 대승을 거두고 이집트를 장악하였다.


하지만 8월 1일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두 척을 제외한 모든 프랑스 전함 들을 격침시켰고 이집트 곳곳에서도 반프랑스 봉기가 일어났다. 나폴레옹은 이들을 잔혹하게 진압하였고 그 사이 나폴레옹과 함께 온 학자들은 이집트의 중요한 유물들을 약탈하고 수집하였다. 1799년 나폴레옹은 시나이 반도를 지나 오스만제국의 영토인 팔레스티나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오스만 군대에 대해서도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보급 부족과 풍토병으로 나폴레옹은 이집트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이때 나폴레옹은 유럽에 제2차 대 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프랑스가 위험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8월 24일 일시적인 영국 해군의 철수를 이용하여 군대를 클레베르 장군에게 맡기고 이집트를 몰래 빠져나와 프랑스로 향했다. 영국의 해상권 장악으로 이집트와 프랑스 간의 연락망은 두절된 상태였고 본국에서는 나폴레옹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쿠데타와 황제 즉위


나폴레옹이 파리에 도착한 때는 10월로 프랑스의 전황은 한결 나아진 상태였다. 하지만 재정은 파탄이 났고 총재정부는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한 상태였다. 오백인회와 원로원이 나폴레옹의 전선 이탈 문제를 두고 격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총재정부 지도자들인 엠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와 그의 동생 루이 시에예스, 로제 뒤코스, 조제프 푸셰, 탈레랑 등의 협력으로 1799년 11월 9일, 즉 안개달(Brumaire) 18일에 쿠데타를 감행하여 체제를 전복시키고 통령정부 체제를 수립하였다.



3명의 통령들이 선출되었지만 나폴레옹은 내정과 외교, 군사권 등을 담당한 제1통령이 되어 사실상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대 프랑스 동맹에 대한 공격을 위해 알프스를 넘어 다시 한 번 이탈리아 북부와 오스트리아로 진격하였다. 1800년 6월 마렝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오스트리아로부터 제국 서부 라인 강변 지역과 북이탈리아를 양도받았다. 이후 1802년에는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영국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짧은 평화의 시기에 나폴레옹은 프랑스 내정 각 분야에 수많은 개혁들을 실시하였다. 조세 제도와 행정 제도의 정비는 물론 프랑스 국내경제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한 산업부흥에 매진했다. 1804년에는 『나폴레옹 법전』을 편찬하여 근대적인 유럽 헌법의 근간을 닦았다. 또한 교육 분야에 있어서도 공공교육법을 제정하여 전국에 걸친 교육기관의 표준화와 통일화를 꾀했고, 수많은 국립 초등 및 중등학교를 세워 전통적인 교리 교육이 아닌 계몽사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문학과 과학 교육을 장려하였다.


또한 교통망의 정비와 미터법에 의거한 도량형의 통일을 통해 프랑스 전역에 보편적이고 일관된 삶의 근대적 기준들을 정착시켰다. 정치적으로는 모든 파벌들을 수용하면서도 어떠한 파벌이든지 자신에게 도전하는 세력은 가차 없이 처단하였다. 또한 1801년 교황과의 정교 협약을 통해 프랑스 내 가톨릭의 우위를 인정하면서도 유대인이나 개신교도들에게도 프랑스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해 주었다.


1802년 종신통령에 취임하여 자신의 독재권을 확립한 나폴레옹은 이제 권력의 화신으로 변모해 나갔다. 물론 주변 인물들의 부추김에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스스로가 새로운 군주가 들어서면 부르봉 왕조의 복귀가 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자코뱅파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나폴레옹은 이제 스스로 황제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1804년 12월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자신과 부인 조제핀의 축성식을 열었다. 여러 가지 차원에서 나폴레옹은 구체제의 부르봉 왕조와 다른 혁명의 유산을 이어받은 황제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공화정을 건설했던 혁명과 제정은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즉 그의 황제 즉위는 혁명에 대한 배반을 의미했고 실제로 베토벤과 같은 많은 사람들이 나폴레옹에게 깊이 실망하였다.


그의 황제 직위는 전쟁과 함께 시작되었다. 1803년 영국의 아미앙 조약 파기 이후 1805년까지 스웨덴,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이 제3차 대 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에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로 쳐들어가 수도 빈을 함락하였고, 이후 아우스터를리츠 전투에서 수적으로 열세였던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체결된 프레스부르크 조약에서 나폴레옹은 신성로마제국 서부 라인 강 유역에 라인 동맹이라는 프랑스 종속 지대를 설정하면서 독일 지역을 재편하였다. 이는 962년부터 내려져 오던 신성로마제국의 실질적인 해체를 의미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바다에서는 뼈아픈 패배를 맛봐야 했다. 이미 10월에 벌어진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해군은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에 궤멸되었기 때문이다. 섬으로 고립된 영국은 대 프랑스 동맹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영국에 대한 원정 실패는 대륙에 대한 나폴레옹의 권력 장악을 불완전하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나폴레옹은 1세는 영국을 철저하게 고립시켜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영국과 대륙의 모든 교역을 금지하는 대륙봉쇄령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이 조치는 이미 많은 식민지를 가진 영국에게는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고, 오히려 나폴레옹의 치하에 있던 대륙의 많은 나라들에게 경제적 악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3차 동맹에서는 중립을 지키던 프로이센이 결국 프랑스에 반대를 표명하면서 영국, 러시아, 스웨덴과 함께 제4차 대 프랑스 동맹을 조직하였다. 하지만 10월에 벌어진 예나전투와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 또한 나폴레옹에게 커다란 패배를 맛봐야만 했다.


다음해인 1807년 폴란드로 진격한 나폴레옹 1세는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동유럽 지역의 영토들을 재조정하여 프랑스 제국의 종속국으로 만들었다. 이제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를 에스파냐 및 나폴리 왕에, 동생 루이와 제롬은 각각 홀란드와 베스트팔리아 왕에 임명하는 등 프랑스 주변 지역들을 속국으로 만들어 통치하였다. 이렇게 해서 나폴레옹 1세는 에스파냐에서 폴란드에 이르는 유럽의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몰락


유럽을 제패할 당시 나폴레옹에게 남은 유일한 근심거리는 바로 황후 조제핀이었다. 그녀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는데 이상하게 나폴레옹과의 사이에서는 후사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불임을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1806년 혼외자식인 샤를이 태어나면서부터 갑자기 태도가 바뀌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이제 불임의 문제를 조제핀에게 돌리면서 1810년 조제핀과 이혼하였다. 그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 마리-루이즈(마리아 루도비카)와 결혼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1811년 마리 루이즈는 기대했던 것처럼 나폴레옹 1세에게 남자 아이를 선사하였다. 후일 나폴레옹 2세라 불릴 이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나폴레옹 1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로마왕’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1812년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를 어기고 있던 러시아를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6월 나폴레옹 1세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출정하였는데 러시아는 청야작전으로 대응하여 프랑스군의 모스크바 점령을 의미 없게 만들었다. 프랑스군은 모스크바까지 어려움 없이 진군하여 모스크바를 점령했으나 별 다른 전투도 없었고 무엇보다 점령당할 사람들이 없었다. 결국 12월에 들어와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자 추위와 기근에 시달리던 나폴레옹의 군대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한겨울 혹한기의 귀국길은 그의 군대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병력의 대부분이 동사로 사망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1813년부터 또 다시 결성된 대 프랑스 동맹의 공격을 맞이해야만 했다. 초반에는 나폴레옹 1세가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기를 잡았으나 결국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대패하여 동맹군에 의해 위협을 받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1814년 3월 31일 파리가 함락되면서 나폴레옹 1세도 퇴위를 당했고 이탈리아 서쪽에 위치한 엘바 섬으로 유배를 떠났다.


나폴레옹 몰락 후에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의 주도로 모든 것을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되돌리고자 하려는 빈체제가 결성되었다. 프랑스에서도 임시정부가 구성되어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부르봉 왕가를 다시 프랑스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는 임시정부위원회가 제안한 1814년 헌장을 승인한 후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이미 프랑스 혁명의 세례를 받은 자유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은 이러한 왕정복고에 강한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왕정복고 초기 무질서한 상황은 나폴레옹에게 다시 재기의 기회를 주었다. 1815년 2월 26일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몰래 탈출하여 28일 프랑스 본토에 상륙했고 파죽지세로 파리로 올라오면서 자신의 세력들을 규합했다. 3월 20일, 마침내 나폴레옹은 파리에 도착했고 루이 18세는 다시 벨기에로 피신하였다. 권력을 다시 잡은 나폴레옹은 주변국들과의 평화를 원했으나 동맹국들이 볼 때 이는 나폴레옹의 세력 확대를 위한 시간벌기에 불과하였다. 초반의 승세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6월 18일 영국과 프로이센이 주축이 된 동맹군과 벌인 워털루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이렇게 해서 약 100여 일 동안 이루어진 나폴레옹의 재기 시도는 완전히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폴레옹 1세는 6월 22일 자신의 황위를 아들 나폴레옹 2세에게 양위한다고 선언하고 미국으로 망명하려고 하였으나 영국 해군에게 체포되어 남대서양 한가운데에 있는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 당시 네 살밖에 안 된 나폴레옹 2세는 모친 마리 루이즈와 함께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양위 선언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다.


임시정부위원회는 벨기에에 도피해 있던 루이 18세를 받아들여 입헌군주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폐된 나폴레옹은 이후 6년 동안 영국인 간수 허드슨 로우의 경멸적인 학대와 감시 아래에서 지내게 되었다. 1821년 5월 5일 오후 5시 49분, 점차 병약해졌던 나폴레옹은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의 사망 원인으로 비소에 의한 독살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의 유해는 1840년 루이 필리프 1세에 의해 프랑스로 되돌아올 수 있었고, 1861년 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에 의해 현재 전쟁박물관이 있는 앵발리드에 안치되었다.


나폴레옹은 종종 키가 작고 왜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 프랑스의 척도 단위인 푸스(pouce)와 영국의 단위인 인치(inch)가 서로 달라서 생긴 오해이다. 현재 전문가들에 따르면 나폴레옹의 키는 미터법으로 환산하여 168cm 정도로 당대인들의 평균 신장 수준이었다고 한다. 오해는 프랑스에서는 1인치에 해당하는 1푸스가 영국식 1인치보다 긴 데서 유래하며 당대인들의 시각에서도 키가 큰 근위대에 둘러싸인 나폴레옹이 상대적으로 작아보였던 탓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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